다시, 화양연화

다시, 화양연화

며칠 전 인스타그램에서 화양연화의 숨겨진 결말에 대해 장만옥과 양조위가 이야기하는 클립을 발견했다

다시, 화양연화

이 클립이 마음에 들어 후배에게 전달했는데, 놀랍게도 후배는 아직 화양연화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그럴만도 한 것이 화양연화가 개봉한 게 2000년, 벌써 25년 전이다. 내가 아직 과거에 살고 있을 뿐이었다.

가을 비가 툭툭툭 근사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일요일 아침에 커피를 한 잔 내리고 화양연화를 틀었다.

난처한 순간이다. 여자는 수줍게 고개를 숙인채 남자에게 다가올 기회를 주지만 남자는 다가설 용기가 없고 여자는 뒤돌아선 후 떠난다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자막. 여자와 남자를 바꾸어도 변하는 것은 없다. 서로를 향한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둘은 계속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한다. 사랑인지, 불륜인지, 비밀인지, 도덕적인 갈등인지, 심지어 이 상황이 실제인지 망상인지 조차 확신할 수 없는 두 남녀의 눈빛과 말과 손짓, 표정 하나하나가 비가역적인 선택이고 유일한 결과였다.

25년 전에도 그 화려하고 정교한 영상에 압도되었던터라 2025년인 지금도 이런 수준의 영상이 있나 싶을만큼 빼어나다. 4K로 리마스터되었다지만 리마스터하지 않았어도 대적할 영화가 없는 것 아닐까?

왕가위 감독은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라며 작품을 소개했다고 한다. 이 표현은 영화에 등장하는 주씨와 진부인의 감정선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촬영 내내 감독과 배우, 대본까지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순간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고자 했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현실과 상상을, 현재와 과거를 교묘히 섞은 편집으로 관객에게도 그 변화의 흐름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 것은 아닌가 할 정도이다.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거리, 여백, 생각할 시간, 거기에 내가 그였다면 같은 상상의 확장까지도.

그렇다면 우리는 고다르나 누벨바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영화를 의미를 전달하는 미디움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고 사유를 넓히는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던 것. 물론 왕가위는 세계보다는 감정에,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인류에게는 보편적인 사랑(을 빌어 어떤 생각과 느낌의 움직임)이라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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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런 의도는 철학적으로 불교의 ‘무상’을 떠올리게 하고 그렇다면 다소 뜬금없는 영화 말미 캄보디아 시퀀스가 충분히 이해된다. 앙코르와트 사원과 승려, 승려가 내려다보는 주씨. 주씨는 오래된 돌 벽의 구멍에 비밀을 말하고 진흙을 뭉개 넣는다. 이 비밀이 나무 구멍이 아니라 돌벽의 구멍인 이유는 주씨가 지닌 간절함 같은 것이었을텐데 그 구멍에서도 푸릇푸릇 새싹이 자란다. 그리고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태고의 사원은 곰팡이가 슬고 낡아 부서져가지만 여전히 영원할 것 같은 견고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무상은 허무함이 아니라 본래 ‘변하지 않는 것은 없음’임을 알고 있다면 왕가위의 의도는 정말 과할만큼 확실하다.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

2000년. 세상의 모든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며 감탄하던 시대. 인생의 절정기를 지나며 영화에 빠져 영상 언어와 역사와 구조를 공부하던 때에 이 작품을 만났으니 어떻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전 세계의 컴퓨터에 버그가 생겨 공멸할 지도 모른다던 밀레니엄의 암울함과 (작년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새 천년에 대한 기묘한 두려움이 대기에 가득한 때, 압도적인 화면 구성과 미장센, 고유한 유화풍의 색감, 아포리움 같은 대사를 쏟아 붓던 왕가위는 칭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은 지나갔다.

지나간 세월은 먼지 쌓인 유리창처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기에 그는 여전히 지난 세월을 그리워 한다.

만약 그가 먼지 쌓인 유리창을 깰 수 있다면 지나간 세월의 그 때로 돌아갈 지도 모른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스크린에 숨 소리도 조심스런 공간에 가득찬 사운드. 1분도 지루하다는 쇼츠의 시대에 먼지 쌓인 세월을 뒤돌아보니, 무엇하나 단정할 수 없는 모호하고 흐릿한 이 이야기에 90분 넘게 집중하던 그때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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