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정 2026.01.27 – 01.31
- 1일차: 인천을 떠나 하노이 입성. 새벽 베트남 야시장에 들러 야식 쌀국수
- 2일차: 호안끼엠 호수를 둘러보고 ‘MẸT’에서 푸짐한 베트남 점심과 롯데마트에서 과일 쇼핑. 망고 만세.
- 3일차: ‘오바마 분짜(Hương Liên)’에서 정통 분짜, 그리고 ‘카페 딘(Đinh)’의 에그 커피 한 잔. 베트남 영묘에서 국가와 혁명, 민중, 선동에 대해 사색.
- 4일차: 탕룽황성. 문묘. 베트남 국립 미술과. 하노이의 전통, ‘자까 한선(Chả cá Hàng Sơn)’에서 맛본 특별한 풍미
- 5일차: ‘Chou Steak’에서의 마지막 점심을 끝으로 짧지만 강렬했던 하노이 여행 마무리
베트남 — 내가 알던 것들, 그리고 더 알아야 할 것들
베트남은, 그러니까 내게는 어떤 우상 같은 나라로 느껴진다. 근 천년간 중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프랑스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미 제국주의를 견뎌 마침내 승리한 나라. 호치민이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는 나라.
거리에 공산당 기가 나부끼고 금성홍기로 대문을 장식하는 나라.


역사: 저항의 나라
베트남은 기원전 수백 년 전부터 홍강 유역에서 문명을 일군 반랑 왕국을 그 시작으로 한다. 그러나 그 역사의 대부분은 ‘저항’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기원전 111년부터 약 1,000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독립 왕조 시대에도 북방의 압력은 끊이지 않았다. 19세기에는 프랑스가 들어왔다. 100년에 걸친 식민 지배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1954년, 디엔비엔푸. 베트남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프랑스를 산악 지형 속에서 완벽히 격파한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미국이었다. 20년에 걸친 전쟁 끝에 1975년 사이공을 함락시키며 베트남은 통일된다. 초강대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한 사실상 유일한 나라. 그것이 베트남이다.
이 전쟁에 한국도 참전했다. 약 31만 명이 파병되었고, 빈호아·퐁니 등지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 역사를 기억하고 있으며, 한국인 여행자로서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호치민 — 혁명가, 그리고 국부
호치민(1890–1969)은 단순한 공산주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모스크바에서 훈련받고, 수십 년간 망명 생활을 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41년 귀국 후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창설하고, 1945년 2차 대전 종전과 동시에 독립을 선언한다. 그의 독립선언문은 미국 독립선언문을 직접 인용할 만큼 민족주의와 보편적 자유 이념을 결합한 것이었다.
군사적으로는 보구엔잡 장군과 함께 프랑스를 꺾고, 이후 미국과의 전쟁을 지도했다(그는 통일을 보지 못하고 1969년 사망한다). 권력자임에도 검소한 생활과 청렴한 이미지로 지금도 베트남 인민의 존경을 받으며, 화폐 지폐에서 도시 이름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은 베트남 전역에 살아 있다.
그가 살아 생전 주장한 지도자의 덕목, 혁명가의 자세는 근검, 절약, 청렴, 정직이었다. 마르크스 – 레닌 – 트로츠키 – 호치민. 이게 공산주의의 적자 계보가 아닐까? 스탈린는 말할 필요가 없고 마오쩌뚱 역시 과오가 크다.
현대 베트남 — 도이머이 이후의 질주
1986년, 베트남은 ‘도이머이(Đổi Mới, 쇄신)’라는 이름의 경제 개혁을 단행한다. 공산당 1당 체제는 유지하되 시장경제를 과감히 도입한 것이다. 이후 연평균 6~7%의 성장률을 꾸준히 기록하며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 중 하나가 되었다.
중위 연령 약 30세.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젊은 나라 중 하나이며, 이 젊은 에너지는 스타트업 생태계로 폭발하고 있다. 우수한 IT 인력과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 덕분에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소프트웨어 개발을 베트남에 외주하고 있다.

‘뚱뚱한 사람이 없는 나라’라는 인상도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쌀국수, 채소, 발효식품 중심의 식문화, 오토바이로 이동하는 생활 습관, 젊은 인구 구조가 맞물린 결과다. 공산주의 이념을 유지하면서도 자본주의적 역동성을 동시에 품은 나라. 그것이 지금 베트남의 가장 독특한 얼굴이다.
호안끼엠 호수 (Hồ Hoàn Kiếm)
하노이의 심장부. 숙소가 호안끼엠 호수와 가까워서 거의 매일 아니 하루에도 몇번씩 지나고 걷고 했던 곳이다.






‘환검호(還劍湖)’라는 이름은 전설에서 비롯된다. 15세기 레 왕조의 레러이 왕이 신비로운 거북이에게 검을 받아 명나라를 몰아낸 뒤, 호수의 거북이가 그 검을 돌려받았다는 이야기다. RPG 게임의 도입부 같다.
호안끼엠 호수 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관광 명소에는 전통 의상을 입고 진지하게 사진 촬영을 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조명을 치고 반사판도 들었고 고가의 카메라를 들었는데 매우 신기한 장면이었따.
성 요셉 성당 (Nhà Thờ Lớn Hà Nội)
호수에서 도보 5분 거리. 프랑스 식민지 시기인 1886년 건립된 고딕 양식 성당으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을 모델로 설계되었다. 쌍탑과 뾰족 아치, 프랑스에서 공수한 스테인드글라스가 그대로 남아 있다.
성당에 들어가 앉아 십자가와 스테인드 글라스를 바라보면 한참 앉아있었다. 바로크 음악이 깔린 고요함은 여행지에서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시간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재작년에 죽은 친구를 생각하며, 어느 덧 80을 바라보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살아 있는 나의 내일은 얼마나 고독한지,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있었다. 식구들도 비슷한 감정인지 뭔가를 기도하기도 하고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타히엔 맥주거리 (Bia Hơi Junction / Ta Hien St.)
올드쿼터 북쪽, 타히엔 거리와 르엉응옥꾸옌 거리가 만나는 교차점. 하노이 최대의 맥주 골목이다. 플라스틱 의자를 인도에 깔고 앉아 크래프트 맥주를 마시는 문화 중심지이다. 네온사인, 음악, 뒤섞이는 현지인과 여행자들, 시끄럽고 혼돈스럽지만 에너지가 느껴진다. 주말에는 야시장이 열리는데 기대만큼 재밌지는 않았다.



우렁이? 찜 같은 요리와 조개 탕, 치킨 윙에 사이공 비어와 콜라 한병이 우리 돈으로 1.4만원 정도로 매우 저렴하다. 싸지만 맛은 굉장했다.


홉온홉오프 관광버스
타네 마네, 여러 차례 의견이 갈렸던 버스인데 마지막 날 특별히 할 일이 없어 마침내 탔다. 우리가 돌아본 여러 관광지들을 복습하는 느낌으로 돌게 됐는데 만족스러웠다. 사실 한국의 지방 도시에서 운영하는 관광버스도 탈만하니까.


호치민 영묘 – 3가지 이야기
이름
호치민은 본명이 아니다. 그가 혁명가로서 살아남기 위해 사용한 170여개의 가명 중 하나. 호치민은 베트남 성씨 호(胡)에 한자 이름 지명(志明))을 합친 것으로 ‘빛을 가져오는 자’ 혹은 ‘깨달은 의지’ 정도의 의미가 된다.
공교롭게도 이 이름은 불교적 깨달음(明)과 혁명적 의지(志)를 동시에 품고 있다. 프랑스, 소련, 미국, 중국 사이를 누빈 혁명가가 스스로 선택한 마지막 이름이 “빛을 가져오는 자”였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혁명의 4대 덕목
호치민은 1949년 ‘근검렴정(勤儉廉正)’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 혁명적 도덕의 핵심으로 네 가지 덕목을 제시했다. 근면, 절약, 청렴, 정직(올바름)이 그것이다.
그는 “근면, 절약, 청렴은 올바름의 뿌리이며, 나무가 뿌리·줄기·잎·꽃·열매가 있어야 온전하듯, 사람도 이 네 덕목이 모두 갖춰져야 온전한 인간이 된다”고 했다. 심지어 유언장에서도 “모든 당원과 간부는 혁명적 도덕을 진정으로 체득하고, 근검렴정을 실천하며, 사심 없이 공정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영묘
위대한 혁명가를 직접 볼 수 있는 감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치민 영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해서는 안됐다.
호치민은 유언장에서 자신을 화장해 달라고 명시했다. 북부·중부·남부 세 곳의 언덕에 유골을 나누어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이유도 분명히 적었는데, 화장이 매장보다 위생적이고 농경지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품성과 일생을 감안할 때, 이 유언은 지켜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정치국은 유해를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심지어 유언장의 화장 내용을 수십년 간 비밀로 은폐했다)
베트남 국립 미술관
이 건물은 1937년 프랑스 식미지 시대에 지어졌고 원래 이름은 ‘잔 다르크 가족 기숙사’였다. 인도차이나 각지에서 하노이로 유학온 프랑스 관리의 딸을 위한 기숙학교. 식민지 점령자 소녀들의 학교가 해방된 국가의 미술관이 됐다.
기숙 학교인만큼 많은 층을 오르락 내리락해야 했고 일반 미술관처럼 동선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는 수천년 베트남 미술사가 켜켜이 쌓여있어 절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가 인상 깊게 본 작품들은 베트남 항전과 관련된 작품들이었는데 특히 전통의 옻칠화 기법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올라간 작품들은 해방의 환호성을 전달하며 정말 큰 감동을 주었다.



여성 게릴라.



대포를 끌다


<무기를 만들기 위해 죽창을 깍다>
아래 작품은 정말 놀라웠다. 베트남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원시 밀림의 곳곳에서 전투를 준비하는 게릴라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나 검은 바탕에 정밀하게 세공된 파스텔톤의 옻칠화로 전통 기법을 잘 살렸다.





아래 작품도 마찬가지. 군사 작전의 호 아저씨. (Uncle Ho on a militartycampaign)



아래는 비엣박 항전 기지의 호 아저씨 (Uncle Ho in Viet Bac resistance base)
호치민은 아마 저 한때에 소를 어루만지며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생각했을 게다.




또응옥반은 1945년 독립 선언 이후 스스로 혁명에 투신한다. 그는 저항 예술가들을 이끌고 타이박(Tây Bắc) 산악 지대의 베트민 야영지로 들어가 새 미술학교를 세웠고, “예술은 혁명에 영감을 주어야 하며 베트남 인민에게 호소하고 그들을 교육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 작품은 2013년 베트남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는 전통의 장인적 옻칠화와 이젤 회화를 결합한 장를 탄생시켰다.


하노이의 톨루즈 로트렉이라 불리우는 부이 쑤언 파이의 작품들. 그는 평생동안 하노이 구시가지 올드쿼터의 골목들을 그렸다.
짜까 라봉 (Chả Cá Lã Vọng) — 하노이가 낳은 단 하나의 요리
‘짜까(Chả Cá)’는 ‘생선 구이’를 뜻하고, ‘라봉(Lã Vọng)’은 레스토랑 입구에 세워진 조각상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 조각상의 주인공은 강태공(姜太公), 즉 강자야(Jiang Ziya)다. 강태공은 낚싯대도 없이, 아니 바늘도 없이 낚시를 했다는 전설적 인물로, ‘때를 기다리는 인내와 재능 있는 사람’의 상징이다.

전통적으로 민물 메기의 일종인 ‘까랑(cá lăng)’을 사용한다. 생선을 토막 내어 강황, 갈랑갈(생강과 식물), 발효 쌀, 각종 양념으로 재운 뒤 숯불에 먼저 굽는다. 이렇게 구워진 황금빛 생선 토막을 뜨거운 무쇠 팬에 기름을 두르고 테이블 앞으로 가져온다. 여기에 산더미 같은 딜(dill)과 파를 넣고 손님이 직접 볶는다. 허브가 살짝 숨이 죽으면 완성이다.
짜까는 거리 음식이 아니다. 하노이의 별미 중 거의 유일하게 길거리가 아닌 레스토랑에서만 제공되는 요리다. 앉아서 직접 팬을 다루고, 각자의 그릇을 조합하는 방식은 식사가 아니라 의식에 가깝다. 하노이 사람들에게 짜까는 특별한 날을 위한 음식이다. 추운 날씨에 특히 어울리며, 뜨거운 무쇠 팬 앞에 여럿이 둘러앉아 먹는 것이 제맛이다.
하노이에 가면 꼭 다시 먹을 음식이었다.
8 Cafe
https://maps.app.goo.gl/f4nYif2mAhF1hjZDA
올해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둘째가 고른 카페. 사람이 없고 분위기가 좋은 카페가 좋다며 한참을 구글링한 끝에 발견한 카페였다. 창 밖으로 내다뵈는 풍경이 유럽의 어디쯤인 듯 했고 핸드드립으로 내린 커피도 아주 괜찮았다.






탕롱 황성 (Hoàng Thành Thăng Long)
유네스코 세계유산 / 2010년 등재
11세기 리 왕조가 하노이를 수도로 정하면서 쌓기 시작해, 이후 쩐·레·응우옌 왕조까지 800년 넘게 베트남 권력의 중심이었던 곳.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원래 황성의 극히 일부다. 전쟁과 시간이 대부분을 앗아갔다.









남아 있는 주요 볼거리는 세 가지다. 황성의 정문인 도안몬(Đoan Môn), 왕조 시대 왕이 군대를 사열하던 팔각형 누각 끼넌각(Kính Thiên Điện) 터, 그리고 미국과의 전쟁 당시 보구옌잡 장군이 실제로 작전을 지휘한 D67 지하 벙커다. 고대 황도 유적 바로 아래에 20세기 전쟁의 흔적이 겹쳐 있다는 것이 이 장소의 가장 이상한 매력이다.
발굴 현장도 개방되어 있다. 황성 건설 당시의 도자기·기와·건축 부재들이 땅속에서 계속 나오고 있고, 유리 바닥 아래로 발굴 현장을 내려다볼 수 있다.
문묘 — 반미에우 (Văn Miếu)
베트남 최초의 대학 / 1070년 창건

유교 국가 베트남이 공자를 모시기 위해 1070년에 세웠고, 6년 뒤 왕자들을 가르치는 국가 최고 교육기관 “국자감(Quốc Tử Giám)”을 병설했다. 800년 가까이 관리 등용을 위한 과거시험의 중심지였다.


다섯 개의 마당을 순서대로 통과하는 구조인데, 네 번째 마당의 “진사비(進士碑)”가 핵심이다. 1442년부터 1779년 사이 과거 합격자 이름을 새긴 거북 등 모양 비석 82기가 줄지어 서 있다. 베트남 현지 학생들이 시험 전에 찾아와 거북 머리를 만지며 합격을 기원하는 풍속이 지금도 이어진다.

가장 안쪽 마당인 “태학당(Thái Học Đường)”에는 리 왕조의 창건 군주 상과 함께 국자감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다. 사진보다 분위기가 좋은 곳이다 — 연못과 오래된 나무들, 붉은 목조 건물이 어울려 하노이에서 가장 고요한 공간 중 하나를 만들어낸다.







베트남 민속학 박물관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54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나라다. 이 모든 소수 민족의 의상, 장신구, 악기, 의례 도구를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1997년 개관. 소장품은 1만 5천여 점의 유물, 4만 2천 장의 사진, 237개의 음성 기록, 373개의 영상 기록으로 구성됐다. 그리고 트립어드바이저가 선정한 아시아에서 가장 흥미로운 박물관 25곳 중 4위에 3년 연속(2012~2014) 이름을 올렸다.

박물관의 3개의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쫑동빌딩은 54개 베트남 공식 민족의 유물 외에도 언어·풍습·정신문화를 담은 인터랙티브 디스플레이와 다큐멘터리 영상이 더해져 흥미를 자아낸다.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붉은 야오족의 자수였다. 손으로 직접 짠 의복에 담긴 문양의 정밀함과 색채는 가까이 볼수록 압도적이다.


두번째. 야외 건축 정원은 2헥타르 규모의 야외 정원에 10개 소수민족의 전통 가옥이 원래의 재료와 기법으로 실물 크기로 복원되어 있다. 들어가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비가 와서 다닐 수가 없었다.
빗소리와 젖은 나무 냄새, 오래된 고상식 가옥들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맑은 날과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진다. 박물관을 서두르지 않고 쉬엄쉬엄 둘러보기에 오히려 좋은 날씨다.


세번째. 연 건물은 전통 동남아시아 연(kite)의 형태에서 형태를 따왔다. 베트남을 넘어 동남아시아 전역의 민족학 전시를 다룬다. 베트남과 주변국 사이의 문화적 교차점과 차이를 비교 전시하며, 인류학·민족학 관련 학술 자료를 갖춘 연구 도서관도 이 건물에 있다.
눈길을 끈 것은 지아라이(Gia Rai) 족의 무덤 조각상들이 서 있다. 죽은 자를 위해 깎아 세운 원시적인 목각 인형들 — 팔을 벌린 것, 무릎을 끌어안은 것, 슬픔인지 춤인지 모를 자세를 한 것들이 빗속에 묵묵히 서 있다.
이것들 앞에 서면 특이한 감정이 찾아온다. 이 인형들이 어느 문명권에서 만들어졌는지 알기 전에, 먼저 알아보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 인류가 죽음 앞에서 공통으로 꺼내드는 감정 — 풍요와 두려움, 애도와 기원. 베트남 산악 소수민족의 장례 조각이 그 감정을 정확하게 건드린다. 세련된 미술관의 정제된 작품이 아니라, 원시의 손이 깎아낸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직접적으로 닿는다.




베트남 소수민족의 대나무 가공품 앞에서 또 다른 종류의 놀라움이 찾아온다. 수백 년 된 농기구와 검에서부터 정교하게 세공된 장신구, 악기, 직물에 이르기까지 — 모든 것이 대나무와 자연 재료의 가능성을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다.


그 정밀한 격자 무늬 바구니,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다루는 대나무 직조물들은 지금 어느 패션 하우스의 쇼룸에 놓여 있어도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수백 년의 손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이 어떤 현대 공예품보다 더 강한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동양의 감성은 서양의 기능주의와 다른 지점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 자연 재료의 결을 거스르지 않고, 그 결이 가는 방향으로 함께 가는 것.





하노이의 매력을 얼마나 느꼈을까? 여건이 허락한다면 내일이라도 다시 가보고 싶은 도시였다.

작은 스쿠터, 오래된 서구식 건물, 베트남처럼 싱싱한 담쟁이 넝쿨 위로 줄지어 걸린 금성홍기. 매일 같이 오가는 익숙한 거리를 벗어나 처음 방문하는 곳에서 눈동자는 자꾸만 커진다.

호치민 영묘에서 내게 손을 흔들어 주던 정말 수백명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이 나라가 얼마나 활력적인지 그리고 얼마나 성장할 것인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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