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27일~28일. 세 번째 제주 역사기행이다. 세 번째라고 해서 발걸음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알면 알수록 끔찍하고, 알면 알수록 처참하며, 무엇보다 그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비(白碑) — 이름을 기다리는 돌
기행의 첫 번째 발걸음은 4.3 평화공원이었다.
공원 한가운데, 비석 하나가 누워있다.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하얀 돌, 백비(白碑). 제주 4.3 항쟁은 아직까지 공식 명칭, 즉 정명(正名)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이 비석에는 이름을 새길 수가 없다. 언젠가 올바른 이름을 찾아 세우겠다는 다짐이자, 미완의 역사를 상징하는 돌이다.
비석들 사이를 걷다가 작은 묘비 하나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고완수의 자 1세 여”
이름도 없다. 태어난 지 한 살, 성별만 기록된 채 세상을 떠난 아기. 추모비에 새겨진 작은 수의가 눈에 들어온다. 말문이 막혔다.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
이 문장 뒤에 얼마나 깊은 회한과 슬픔이 숨겨져 있을까. 가해자도 피해자도 뒤엉킨 그 시절, 살아남은 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이었을지도 모른다.
7년 7개월의 학살 — 국가 폭력의 기록
제주 4.3 항쟁은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집회에 참여한 민중에게 경찰이 총을 발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54년 9월 21일까지, 무려 7년 7개월이 지속됐다.
배경이 복잡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본질은 단순하다. 경찰이 총을 쏘며 시작됐고, 이승만 정권이 계엄을 선포한 뒤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전형적인 국가 폭력이다.
희생자는 약 3만 명.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이다. 그 대부분은 군인이나 무장대가 아닌 민간인이었다. 여성, 어린이, 노인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마을 전체가 통째로 사라진 곳도 많았다. 학살과 연좌제에 대한 공포 때문에 당시의 이야기들은 아직도 모두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자국민을 이토록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학살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한다. 이승만이 계엄을 선포했다. 이승만이 초토화 작전을 지시했다. 우리가 불과 두 해 전에 겪은 계엄이 바로 그것의 연장선에 있다.
목시물굴 — 따뜻한 햇살 아래 감춰진 것들
따뜻한 봄 햇살이 현무암을 비추고 있었다. 그 아래, 목시물굴이 있었다.


토벌군은 이 굴 속에 숨어 있던 200명의 주민을 학살했다. 그리고 휘발유를 뿌려 불태우고 그대로 유기했다.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 속에, 이런 장면들이 겹쳐 있다.
제주를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 섬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을 탓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한 번쯤은 돌아봐 주길 바란다.

화섬노조 역사기행, 함께 걷는다는 것
올해 화섬노조 역사기행은 한층 더 발전했다. 새로 도입한 개인별 이어폰 해설 시스템에 대한 조합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각 차량에 탑승한 해설자 선생님들의 역사와 자연에 대한 넓은 지식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무거운 기행을 마치고 들른 함덕해변의 고운 모래와 에메랄드빛 바다가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마음속 어딘가는 여전히 무거웠다.
이런 역사 앞에서 ‘전쟁 반대, 미국 반대, 파병 반대’라는 구호가 때로는 힘이 빠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구호들이야말로 4.3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상식적인 교훈이기도 하다.
4.3 평화공원의 백비에 정명이 새겨지는 날까지.
우리는 계속 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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