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명 (Hidden Blade, 2023)
양조위의 얼굴에 이끌려 시작한 영화였다. 그런데 막상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머릿속에 더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건 왕이보였다. 젊고 잘 생겼다. 그러나 양조위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
영상미만큼은 타협이 없다
이 작품의 가장 큰 강점은 단연 영상미다. 배우들의 얼굴을 따라 굴곡지는 섬세한 조명, 무엇 하나 버릴 것 없는 꽉 찬 구도. 꽉 차 있다고 했지만, 어떤 씬들은 오히려 여백으로 가득 차 관객의 감정을 조용히 채워오기도 한다. 흑백으로, 광각으로, 때로는 오래된 필름 감성으로—마치 한 편의 사진전을 둘러보는 것 같다. 지루한 구도가 거의 없다.
‘색, 계’와 ‘화양연화’의 의상팀, 그리고 뛰어난 촬영감독이 참여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이 화면 곳곳에서 느껴진다. 양조위의 정장과 담배, 그 위로 드리우는 느와르풍 조명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다.

서사는 단순하지만, 편집은 난잡하다
기본 서사는 사실 단순하다. 일본 점령 하의 상하이, 공산당 비밀 공작원들의 이중 생활—누가 진짜 아군인지를 관객이 추적해가는 구조다. 문제는 1938년, 1941년, 1945년을 종횡무진 오가는 교차 편집이다. 집중하지 않으면 초반부는 꽤 혼란스럽고 다소 난잡하게 느껴질 수 있다. 다만 기본 흐름 자체가 직선적이라, 넋 놓고 보고 있어도 중반부쯤 되면 대강의 맥락이 잡히기 시작한다.
한국판 리메이크도 가능하지 않을까
흥미로웠던 건, 이 영화의 정서가 낯설지 않다는 점이었다. 중국 역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피해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친일 부역자와 변절자에 대한 분노가 사회 저변에 깊이 깔려 있다. 난징 대학살, 731부대의 생체실험—우리에게도 익숙한 역사의 상처들이 이 영화 속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무고한 중국인들을 시멘트로 생매장하는 일본군의 만행 시퀀스는 실로 끔찍하다. 한국을 배경으로 리메이크해도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명’은 영상 한 컷 한 컷은 아름답지만 전체로서의 무게감은 다소 아쉬운 영화다. 만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크푸드도 아닌, 매우 멋지게 플레이팅 했지만 어중간한 맛이 난다. 볼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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