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건 8할이 바람이다.

나를 키운건 8할이 바람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서정주)

나를 키운건 8할이 바람이다. 라고 서정주가 얘기한 적 있다.

예전 같으면, 독기를 품고 ‘쓰레기’라고 욕했을 것이다.

…요새는 좀 다른데, 아무래도 나이탓인가 보다. ‘그 인간은 역겨우나, 표현은 참 멋들어진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는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일 행각 뿐만 아니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에 이르기까지 독재정권에 대해서도 끝없이 찬양을 이어가는 역사적 과오를 범했다. 문학적 업적과 별개로 이는 누구도 잊어서 안되는 반역 행각이다.

그가 전두환 정권에 어떤 아양을 부렸는 지 살펴보라.

나를 키운건 8할이 바람이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서정주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아세안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시고

또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흥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 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1987.1

이하, 이 문서를 찾아보는 분들께 좀더 자세한 그리고 역겹고 더럽고 치졸한 그리고 무엇보다 용서해서 안되는 친일반민족 행위자 서정주의 생을 정리해 둔다.

들어가며

서정주(1915-2000)는 ‘자화상’, ‘국화 옆에서’ 등으로 한국 현대시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시인이다. 토속적이고 불교적 주제를 다룬 그의 시적 업적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문학적 성취와 별개로, 그의 친일 행각과 독재정권 부역은 역사적으로 명확히 기록되고 비판받아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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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발적이었던 친일 행각

창씨개명과 친일 문필 활동

서정주는 1942년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친일문학지 『국민문학』, 『국민시가』의 편집에 참여하면서 총 11편의 친일 작품을 발표했다.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 「인보의 정신」(1943), 「스무 살 된 벗에게」(1943), 일본어 시 「항공일에」(1943), 단편소설 『최제부의 군속 지망』(1943), 시 「헌시」(1943), 「오장 마쓰이 송가」(1944) 등으로, 대부분 태평양전쟁을 성전으로 미화하면서 학병지원 권유, 징병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종군기자로 적극 협력

1943년 서정주는 최재서와 함께 일본군 종군기자로 사병의 군복을 입고 취재를 다녔다. 그는 1944년 12월 매일신보에 ‘송정오장 송가’를 기고했는데, 이는 창씨개명하고 가미카제 특공대로 끌려간 조선청년 인재용을 극찬하는 내용이었다.

자발적 선택이었던 친일

해방을 맞이할 때 서정주는 우리 나이로 갓 서른이었다. 그것은 그가 일제에 협력하라는 압력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는 그의 친일이 자신의 자발적인 행위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2. 반성 없는 변명

서정주는 자신의 부역행위에 대해 어떠한 반성도 표하지 않았다. 자전적 글에서 그는 자신을 ‘친일파’, ‘부일파’로 부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며, 일본의 “욱일승천지세 밑에서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로 체념하면서 살아간 것”이라고 강변했다. ‘하늘뜻에 따라 일제에 순응했다’는 이러한 변명은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는 파렴치한 태도다.

그는 “일본이 그렇게 쉽게 질 줄 몰랐다”, “못 가도 몇 백 년은 갈 줄 알았다”고 변명했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며 “친일행위는 했으나 받은 대가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제자의 용서 요청도 거부

1985년 제자인 소설가 조정래가 광복 40주년을 맞아 친일 전력이 있는 문인들에게 지면을 통해 사죄할 기회를 주려 했을 때, 서정주를 찾아가 “글 마지막에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하시면 선생님께서는 자유로워지십니다”라고 말했으나, 서정주는 “네가 내 제자로서 그럴 수가 있냐”며 크게 화를 냈다.

3. 독재정권에 대한 부역

이승만 정권 협력

서정주는 이승만으로부터 친일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받고 ‘이승만 박사 전기’를 집필했다. 해방 후에도 그는 권력에 협력하는 삶을 이어갔다.

박정희 정권 지지

서정주는 박정희의 5·16 쿠데타와 유신체제를 지지했다. 1962년 ‘5·16 문예상’ 본상을 수상했고,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전두환 정권 찬양의 극치

1980년대 초 서정주는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통령 선거 때 전두환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고, 전두환의 56회 생일을 맞아 ‘전두환 예찬시’를 썼다. 그는 5·18 광주학살로 권력을 탈취한 전두환을 “단군 이래 최고의 미소를 가진 대통령”이라고 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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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이 직선제 개헌요구를 거부하고 현행 헌법을 유지한다는 4·13 호헌조치를 “구국의 결단으로 지지한다”는 성서정주 시인의 친일 행각과 독재정권 부역: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 과오

들어가며

서정주(1915-2000)는 ‘자화상’, ‘국화 옆에서’ 등으로 한국 현대시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시인이다. 토속적이고 불교적 주제를 다룬 그의 시적 업적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문학적 성취와 별개로, 그의 친일 행각과 독재정권 부역은 역사적으로 명확히 기록되고 비판받아야 할 문제다.

1. 자발적이었던 친일 행각

창씨개명과 친일 문필 활동

서정주는 1942년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친일문학지 『국민문학』, 『국민시가』의 편집에 참여하면서 총 11편의 친일 작품을 발표했다.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 「인보의 정신」(1943), 「스무 살 된 벗에게」(1943), 일본어 시 「항공일에」(1943), 단편소설 『최제부의 군속 지망』(1943), 시 「헌시」(1943), 「오장 마쓰이 송가」(1944) 등으로, 대부분 태평양전쟁을 성전으로 미화하면서 학병지원 권유, 징병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종군기자로 적극 협력

1943년 서정주는 최재서와 함께 일본군 종군기자로 사병의 군복을 입고 취재를 다녔다. 그는 1944년 12월 매일신보에 ‘송정오장 송가’를 기고했는데, 이는 창씨개명하고 가미카제 특공대로 끌려간 조선청년 인재용을 극찬하는 내용이었다.

자발적 선택이었던 친일

해방을 맞이할 때 서정주는 우리 나이로 갓 서른이었다. 그것은 그가 일제에 협력하라는 압력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는 그의 친일이 자신의 자발적인 행위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2. 반성 없는 변명

서정주는 자신의 부역행위에 대해 어떠한 반성도 표하지 않았다. 자전적 글에서 그는 자신을 ‘친일파’, ‘부일파’로 부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며, 일본의 “욱일승천지세 밑에서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로 체념하면서 살아간 것”이라고 강변했다. ‘하늘뜻에 따라 일제에 순응했다’는 이러한 변명은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는 파렴치한 태도다.

그는 “일본이 그렇게 쉽게 질 줄 몰랐다”, “못 가도 몇 백 년은 갈 줄 알았다”고 변명했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며 “친일행위는 했으나 받은 대가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제자의 용서 요청도 거부

1985년 제자인 소설가 조정래가 광복 40주년을 맞아 친일 전력이 있는 문인들에게 지면을 통해 사죄할 기회를 주려 했을 때, 서정주를 찾아가 “글 마지막에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하시면 선생님께서는 자유로워지십니다”라고 말했으나, 서정주는 “네가 내 제자로서 그럴 수가 있냐”며 크게 화를 냈다.

3. 독재정권에 대한 부역

이승만 정권 협력

서정주는 이승만으로부터 친일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받고 ‘이승만 박사 전기’를 집필했다. 해방 후에도 그는 권력에 협력하는 삶을 이어갔다.

박정희 정권 지지

서정주는 박정희의 5·16 쿠데타와 유신체제를 지지했다. 1962년 ‘5·16 문예상’ 본상을 수상했고,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전두환 정권 찬양의 극치

1980년대 초 서정주는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통령 선거 때 전두환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고, 전두환의 56회 생일을 맞아 ‘전두환 예찬시’를 썼다. 그는 5·18 광주학살로 권력을 탈취한 전두환을 “단군 이래 최고의 미소를 가진 대통령”이라고 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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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이 직선제 개헌요구를 거부하고 현행 헌법을 유지한다는 4·13 호헌조치를 “구국의 결단으로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88년 서정주는 자신의 시집 『80소림』을 출간했는데, 이 시집에는 전두환 찬양시 10편이 실려 있다. 독재자를 찬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집으로 엮어 출판한 것은 권력에 대한 아부의 극치였다.

4. 공식적 인정과 비판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서정주는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문단과 학계의 비판

서정주의 친일과 독재 부역에 대한 비판은 지속되어 왔다. 특히 그가 어떠한 반성도 없이 문단의 원로로 군림하며 각종 문학상과 명예를 누렸다는 점에서 더욱 비판받고 있다.

5. 시인으로서의 업적과 역사적 책임의 분리 불가

서정주는 분명 한국 현대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시인이다. ‘자화상’, ‘국화 옆에서’, ‘춘향유문’ 등의 작품은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토속적이고 생명력 있는 언어로 한국시의 영역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문학적 업적이 역사적 과오를 면죄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시인이라는 지위와 영향력을 가진 지식인으로서 그의 부역 행위는 더욱 무거운 책임을 수반한다.

지식인의 책임

시인과 작가는 단순히 아름다운 말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시대의 양심이자 목격자로서 진실을 말해야 할 책임이 있다. 서정주는 이러한 지식인의 책임을 저버리고, 오히려 제국주의 전쟁을 미화하고 독재를 찬양하는 데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사용했다.

특히 학병 지원을 독려하고 가미카제 특공대를 찬양한 그의 글은 실제로 수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선전물이었다. 이는 단순한 생존을 위한 굴종이 아니라, 적극적인 협력이었다.

6. 반성 없는 영광: 문제의 핵심

서정주의 문제는 단순히 친일과 독재 부역을 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해방 후, 그리고 민주화 이후에도 그가 어떠한 반성이나 사과 없이 문단의 최고 원로로서 각종 상과 명예를 독점했다는 점이다.

그는 생전에 다음과 같은 영예를 누렸다:

  •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 중앙문화대상 본상 (1980)
  • 대한민국 문학상(1993)
  • 이산문학상(1994)
  • 만해문학상(1994)
  • 호암상 예술상(1997)

이러한 영예는 그의 문학적 업적만을 보고 주어진 것이지만, 그가 저지른 역사적 과오를 덮어주는 효과를 낳았다. 이는 한국 사회가 친일과 독재 협력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7.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서정주의 시를 읽고 그 문학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과, 그의 역사적 과오를 비판하는 것은 양립 가능하다. 오히려 우리는 반드시 양쪽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역사적 교훈

서정주 사례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1. 재능과 도덕의 분리: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서 역사적 책임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2. 지식인의 무거운 책임: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지식인일수록 시대에 대한 책임이 더 크다.
  3. 반성의 중요성: 과거의 잘못보다 더 큰 문제는 반성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4. 역사 청산의 필요성: 친일과 독재 협력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면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나오며

서정주는 뛰어난 시인이었지만, 동시에 친일과 독재 부역으로 역사에 오점을 남긴 인물이다. 그의 시를 읽고 감상하되, 그가 저지른 역사적 과오를 함께 기억하고 비판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문학적 업적과 역사적 과오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그의 시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도, 동시에 그가 그 문학적 재능을 어떻게 오용했는지를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서정주의 사례는 우리에게 지식인의 책임과 역사 청산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반면교사로 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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